귀향





동생이 일본의 골든위크를 맞이하여 휴가를 얻어 귀향하게 되었었다.  그런 이유로 사촌동생들도 오고 고향인 금호의 과수원에도 가고 산소에도 가 볼 기회를 갖게 되어 그 사진들을 찍어 포토로그에 올리면서 쓰는 포스트


처음으로 밤에 사진 찍으러 나와 셔터를 열심히 눌렀으니 결과는 대참패.  플래쉬가 확산되는 바람에 피사체가 몽땅 시커멓게 보이는 통에 플래쉬 없이 찍었더니 죄다 흔들려 남은 사진은 저 폭죽사진 밖에 안 남았다.  광안대교 사진은 정말 억지로 끼워넣은 거고
새벽까지 노래방에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으나 3년간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은 “음치”가 된다는 사실만 처절하게 깨닫고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금영/태진 반주기 사이트를 뒤져 부를 수 있는 수록곡을 미리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을 해 놓으니 선곡이 빨라서 좋긴 좋더라.  단점이 있다면 입력할 수 있는 문자의 길이에 한계가 있기때문에 보통 번호만 찍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반주기에 번호를 찍어보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광란(?)의 하루는 지나 늦게 일어난 덕에 모든 일이 늦어지게 되어 고향인 금호에도 늦게 가게 되었는데 마침 막내숙부님 부부가 와 있던 관계로 밭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감상에 젖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도 커 보이던 과수원이 지금 보면 그다지 넓어보이지도 않고, 그 많던 나무들은 모두 베어져 사라져 있었으며(하긴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부터 사과농사는 짓지 않으셨으니 나무가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지) 밭의 대부분은 상추, 파, 들깨같은 자잘한 뿌리작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이전에 있던 초가집은 어느 사이엔가 그 형체도 없이 사라졌으며 고모가 쓰던 독채는 창고가 되어있었고 사과창고는 폐쇄되어 있었으며 콘크리트로 지었던 집은 전체적으로 멀쩡해보였지만 지붕은 확실히 엉망진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본 집의 내부 중에서 그렇게 넓어보이던 작은 방은 어느 새 어른 넷이 들어가면 넉넉해보일 정도일 뿐 ‘넓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을 정도였었는데 당시는 피아노와 책상이 놓여 있었기때문에 어떻게 어른 8명과 아이 5~6명(나머지는 안방에서 잤음)이 잠을 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일이 없으면 가끔 아버지는 올라오실 정도였지만 내가 온 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처음이라 뭐라고 해야 할 지 참 할 말을 잊게 만드는 광경들이 많았었다.  그래도 나무는 꾸준히 성장했는지 목련나무는 엄청 커져서 그 꽃을 피우고 있었고 더 이상 키우지 않는 개가 살던 집은 방치되어 있었지만 그 옆에서 자라는 식물과 저장고를 두르고 있는 담쟁이 덩굴은 여전하더라


그렇게 과수원을 뒤로 하고 선산으로 향했는데 늘 그렇지만 산을 지지리도 타지 못하는 내 입장으로선 선산에 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어서 웬만하면 가려하지 않았는데 오늘 역시 따라갔다 ‘갈 수 있는 곳이 못 된다’는 것만 절실히 깨닫고 돌아와야 했었다.  성묘를 할 수 있는 곳까지 간 건 좋았지만 기어서라도 올라갈 수 있었던 산은 내려올 때가 더 지옥이었으며 입고 간 옷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이젠 더이상 어린이가 아니다보니 부모님을 늘 잡고 갈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더 고생을 해야 했었다.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와야 하는 곳이 선산이다보니 늘 같은 고생을 하면서도 그다지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기에 언제 한 번 다시 갈 일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과수원이 도로확장공사로 인하여 상당부분이 먹혀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기억하던 땅의 모양이나 집을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  길지는 않아도 근 15여년을  1개월이든 며칠이든 지내던 집의 추억이 공사로 인해 사라진다는 것은 역시나 씁쓸한 일이다.  과연 나는 고향의 추억을 언제까지 갖고 갈 수 있을지, 그 추억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이제는 있을지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砂沙美에 대하여

게임은 게임, 현실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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